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철수씨 남매에게 6천만 원의 빚을 남겼습니다. 계약직으로 일 년에 2천만 원 남짓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내부터 독신으로 연소득이 1억에 달하는 장녀까지, 소득과 집안사정이 다른 4남매는 이 빚을 어떻게 나눠서 갚아야 할까요?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지 명쾌하게 정리해 냅니다. 그리고 그의 정의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대우하고,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 즉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한 상황을 통해 알아볼까요?

유레카! 정의의 해답을 찾는 것이 매우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정의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자격에 따라 분배하면 된다’는 명제에 동의하더라도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정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발 3켤레를 만든 사람이 가죽을 가져왔다면, 그래도 7:3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또 신발을 만든 사람이 신발을 팔았다면? 이처럼 한 가지 조건만 달라져도 분배 정의의 문제는 대단히 복잡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에 대해 논쟁해왔습니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각자의 몫을 적절하게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가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의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공리주의’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의 명료하고도 획기적인 이 기준을 제시한 이가 바로 제레미 벤담입니다.

벤담은 사후 자신의 몸을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사후에 벌어지는 일에 관한 종교적 미신이 대단했는데요. 만약 시신이 해부돼 토막이 나면 영생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벤담은 이러한 시대적 미신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의학 발전을 위해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 것입니다. 신체가 움직이는 방법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체의 구조를 알아야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제시한 벤담다운, 당시로서는 무척 진보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고통과 쾌락’ 공리주의 관점으로 피자 나누기

벤담은 인간 행동의 밑바탕에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늘리는 계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벤담은 그의 책 <도덕과 입법의 원리서설>에서 인간은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을 모신다는 표현을 하지요. 생각할수록 벤담의 이런 분석은 참 훌륭합니다. 벤담은 분배에 있어서도 쾌락의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 분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쾌락과 고통의 양을 수치화해서 계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관점으로 다섯 명에게 피자 다섯 조각을 나눠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반적인 한 명에게 한 조각씩 나눠줄 수도 있겠지만, 공리주의적 방법으로 쾌락을 계산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벤담의 공리주의적 분배원칙

이처럼, 공리주의자 벤담에게 정의란, 전체효용을 위해 다소 섭섭한 사람이 생기더라도 효용이 높은 사람에게 피자 두 조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 쾌락의 양을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피자를 안줘도 괜찮은 걸까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회적 약자일 수도 있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20세기 정의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존 롤즈입니다. 1971년 존 롤즈는 <정의론>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 신분, 성격 등 사회적 조건을 알 수 없는 공정한 입장에서 상황을 직시해보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무지의 베일 상황은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실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무지의 베일을 쓰면 자신이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알 수 없게 되고, 건강한지 아닌지 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인종 종교 성격 등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원초적 입장입니다. 이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해 만든 규칙들이 바로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입니다.

EBS<다큐프라임-법과 정의> 에서는 이러한 ‘무지의 베일’ 상황을 통해 앞서 언급한 철수씨 4남매의 빚에 대한 실험을 진행해봅니다. 과연 참가자들은 어떤 결과를 내놓았을까요?

롤즈 <정의론>의 핵심 중 하나는 삶의 출발선상에 존재하는 불평들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여기 4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꿈은 모두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롤즈는 “모두 같은 동기와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학업과 직업적 성취와 관련한 통계적 상관관계가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타고난 운 때문에 인생이 좌우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삶의 출발선을 동등하게 만들어주어야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이지요.

롤즈는 그의 정의론을 ‘A Theaory of Justice’ 라고 했습니다. 정의에 관한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일 뿐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각 사회 공동체마다 서로 다른 정의의 원칙들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BS<다큐프라임-법과 정의>를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정의의 원칙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