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상

법과 정의. 두 단어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생활 전반에서 쉽게 마주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라고 하면 뭔가 어렵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법과 분리된 삶이 가능한 것일까요? 법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시스템이며, 우리에게 물이나 공기 같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BS<다큐프라임-법과 정의> 제작진이 1년 넘게 고민했던 부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바로 ‘과연 법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큰 주제 역시 ‘ 법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법이 정의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법과 정의’에 철학자들의 법과 정의에 대한 담론, 그리고 법역사를 바꾼 위대한 순간들을 법학도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의 냉철하고도 따뜻한 시각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1920년대 미국, 사법부 최고 기관인 연방대법원은 한 젊은 여성에게 강제불임시술을 명령합니다. 그 후 미국 전역에서 무려 60,000명 이상이 강제불임시술을 받게 된 것은 물론, 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이 사례를 자신들이 저지른 강제불임시술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이 사례의 주인공은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의 캐리 벅(1906~1983)이라는 당시 스물 한 살의 젊은 여성이었는데요. 이혼한 어머니가 몸을 팔면서 구걸을 하는 등 하층민 생활을 하다가 수용소에서 가게 되자 캐리는 돕스가에 입양됐고, 그곳에서 돕스 부인의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열일곱 살에 딸 비비안을 출산하게 됩니다. 돕스부부는 집안체면 때문에 캐리를 도덕관념이 없고 정상이 아닌 정신상태라고 그녀를 몰고 가며 캐리를 수용시설로 보냅니다. 나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찬 불행이 닥친 것입니다.

1923년 당시의 미국에서는 인간 종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우생학(콩 모양과 색깔을 바꾸듯 가축과 인간까지도 개량할 수 있다는 학문)이 유행이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3대 이상 저능아를 출산한 경우라면 강제불임시술이 가능하다”며 캐리에게 강제불임시술을 선고한 것입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캐리는 ‘3대 이상 저능아를 출산한 가계의 일원’도 ‘정신박약’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생학적 불임시술의 전형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각본이었고 캐리는 희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죠.

자 그렇다면, 설사 캐리 집안이 저능아를 출산한 가계라면, 또는 그녀가 정신박약이라면 불임시술을 강제해도 되는 것일까요? 개인의 기본권을 법률이 강제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법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요?

정의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펼친 그리스의 두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69?~BC 399)와 트라시마코스(BC 459~BC 400)의 대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 - 트라시마코스!! 당신은 정의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트라시마코스 – 강자의 행동이 정의죠.
소크라테스 - 왜 그렇게 생각하죠?
트라시마코스 - 우리 도시국가 중엔 민주정치를 하는 나라도 있고, 귀족정치를 하는 나라도 있지요? 그 여러 나라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지배자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 트라시마코스 선생!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봅니다.마찬가지로 통치자는 통치 받는 시민들을 이롭게 하는 사람 아닙니까.
트라시마코스 - 소크라테스 선생님. 그렇다면 목동들은 양을 위해서 양을 모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소크라테스 - 글쎄,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 법이 누구 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지배자들이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400여년 전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와 정의란 누구의 이익인가를 두고 논쟁을 펼칩니다. 트라시마코스는 법과 정의가 강한 자의 편이라고 주장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플라톤의 국가론 제 1권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국가론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이기에 논쟁의 승자는 소크라테스입니다. 하지만 법과 정의가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역시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법이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법의 이름으로 불임시술을 강요당한 캐리 벅을 생각하면, 선뜻 소크라테스의 편을 들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나 사슬에 얽매여 있다루소 <사회계약론> 중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하나의 상식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인간이 평등하지 않은 시대가 훨씬 더 길었지요. 우리나라만 봐도 양반과 평민, 천민 등 신분제가 당연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사슬에 얽매여 있고, 현실은 불평등하다고 봤습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사람들이 정의와 불공정의 규범을 함께 결정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이론입니다. ‘국민을 넘어서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민만이 유일한 주권자‘ 라는 주장을 펼친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영웅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프랑스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명시하는 ‘프랑스 인권선언’이 선포되었으며, 모든 시민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 헌법상의 원칙’이 생겨났습니다. 세계 여러나라의 헌법은 침해 당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이를 수호하는 국가의 임무를 명시한 선언이자 약속입니다. ‘대한민국 헌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제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중심축에 있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그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법체계가 제대로 잘 기여하고 있느냐, 봉사하고 있느냐 그것을 계속 확인하고 점검해야 됩니다.”한인섭 서울대 교수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합니다. 우리 사회는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과 시민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 안전하게 생존할 권리가 지켜지지 못한 것이죠.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법이 정의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가 좀 더 정의로워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건전한 시민들이 필요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의 희망 또한 줄어드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을 필요로 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요.”마이크 왈저